
에디터, 스타일리스트, 비주얼디렉터 그리고 지금의 더프레이즈까지... 여러 일을 동시에,혹은 시기를 달리하며 해오셨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일들을 오가면서도 스스로 놓지 않고 계속 지켜온 기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돌아보면 제가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오고 좋아했던 것들이 모여 자연스럽게 저만의 기준이 생긴것 같아요. 클라이언트에게 의뢰받은 프로젝트를 할 때는 브랜드가 원하는 방향과 저의 관점 사이에서 접점을 찾고, 온전히 저희의 관심사를 반영할 수 있는 더프레이즈 내부 프로젝트에서는 그것들을 기획의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오래 좋아해온 것도 새로운 맥락에 놓이면 또 다른 가능성이 생기는 것 같아요.
더프레이즈(The Phrase)라는 공간을 만들 때 가장 깊게 고려한 이미지는 무엇이었나요.
반듯하게 정돈된 말간 도화지 같은 공간을 상상했습니다. 공간 안에 놓일 책이나 오브제의 컬러와 디자인이 다양하고 밀도가 높으니, 공간은 이를 소화할 수 있도록 최대한 담백하고 깨끗하게 만들고 싶었어요. 서점이 자리한 1 층에는 새로 입고된 책들의 표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메인 월을 두었고, 책이 놓이는 방식에도 조금씩 변화를 주고 있습니다. 이 공간을 구현하는 데는 공간 디자이너 조현석 실장님의 도움이 컸습니다.
일을 할 때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이 개입한적이 있나요. 어떤 향이나 소리, 촉감이 구체적으로 영향을 준 경험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향과 소리에 꽤 민감한 편이어서 어떤 공간이나 장면을 기억할 때 시각적인 이미지뿐 아니라 그때 들었던 음악이나 향이 함께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일을 할 때도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완성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특히 더프레이즈에서는 공간에 흐르는 음악이나 향도 책이나 오브제를 배치하는 것만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같은 공간도 어떤 음악이 흐르는지에 따라 머무는 속도나 분위기가 꽤 달라지니까요. 향 역시 공간의 인상을 만드는 요소라고 생각하지만, 의도적으로 강한 향을 더하기보다는 공간에 놓인 책과 종이, 식물의 향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는 상태를 좋아합니다.
지금 하시는 일은 모두 아주 섬세한 큐레이팅으로 느껴져요. 감각을 늘 예민하고 날카롭게 다듬어야 하는 일 같기도 하고요. 그 긴장을 잠시 내려놓고 스스로를 환기하는 나름의 방법이 있으신가요? 여행이나 쇼핑 혹은 어떤 특별한 루틴이 있을까요?
일상을 벗어난 공간에서 가장 큰 환기를 얻는 것 같아요. 시간이 나면 가까운 해외에 잠시라도 다녀오려고 해요. 익숙한 환경을 벗어나 낯선 동네를 걷고, 서점이나 상점에 들르고, 그곳의 사람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많이 환기됩니다. 꼭 무언가를 얻어오려 하기보다는 평소와 다른 것을 보고 듣는 시간 자체가 좋은 환기가 되는 것 같아요.
후각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향에 민감한 편이에요. 특히 여행하면서 인상 깊었던 공간이나 좋아했던 사람을 향으로 기억하기도 해요. 사진처럼 구체적인 장면이 남는 것과는 조금 다르게, 어떤 향을 우연히 다시 맡았을 때 그때의 장소나 사람, 기분이 한꺼번에 떠오르는 순간이 있잖아요. 저에게 후각은 그런 기억을 오래 남겨주는 감각인 것 같아요.
처음 맡은 냄새, 생애 첫 향에 대한 기억이 있으세요? 어떤 장소거나 어떤 사람이거나요.
생애 첫 향은 아니지만, 5 월과 6 월 사이에 맡을 수 있는 아카시아 꽃 향은 저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그 향을 맡으면 사랑 앞에서 가장 바보 같았고, 꿈 앞에서는 가장 무모했던 어떤 시절이 선명하게 떠올라요.
처음 뿌린 향수는 어떤 거였어요?
의상학도였던 20 대 초반에 마크 제이콥스의 데이지(Daisy)를 썼어요. 이름처럼 데이지 꽃을 모티프로 한 향수병과 캠페인 이미지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지금도 좋아하는 영화감독 소피아 코폴라가 데이지의 캠페인 영상을 연출했고, 사진가 유르겐 텔러가 촬영한 이미지들도 좋아했어요. 그 나이의 저에게 잘 어울렸던 깨끗하고 풋풋한 플로럴 향으로 기억해요.
요즘은 어떤 향수를 쓰세요?
셀린느(CELINE)의 렙틸(Reptile), 퍼퓨머 H(Perfumer H)의 레인 우드(RAIN WOOD), 산타 마리아 노벨라(Santa Maria Novella)의 타바코 토스카노(Tobacco Toscano)를 그날의 기분이나 상황, 옷차림에 따라 번갈아 사용해요. ‘렙틸’이 스스로에게 조금 더 집중하고 각성하게 만드는 성숙한 향이라면, ‘타바코 토스카노’는 마음의 안정과 위로가 필요한 날 찾게 되는 포근한 향이에요. 심신을 편안하게 해주는 ‘레인 우드’은 일에서 완전히 벗어난 휴일에 뿌리곤 하죠. 최근 휴가로 방문했던 상해 아만 양윤과 잘 어울리는 향이었어요.
새로운 향수를 고르게 될 때 가장 고려하시는 건 뭔가요.
저에게 잘 어울리는 향인지, 그리고 그 향을 맡았을 때 어떤 기분이 드는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요. 좋은 향이라고 느끼는 것과 내가 직접 뿌렸을 때 기분이 좋아지는 향은 조금 다른 것 같아요. 향수를 고르는 건 옷을 고르는 것과도 비슷해요. 그 향을 뿌렸을 때의 나를 상상해보곤 하죠.
지금까지 썼던 향수 중 좋아하는 것들을 말씀해주세요.
20 대 후반부터 30 대 중후반까지 르 라보(Le Labo)의 어나더 13(Another 13)을 꽤 오랫동안 썼어요. 오래 좋아했던 파리의 편집숍 ‘꼴레뜨’를 통해 처음 알게 된 향이기도 해요. 종이나 잡지, 잉크를 떠올리게 하는 드라이한 느낌과 어딘가 인공적이고 차가운 인상을 좋아했어요. 그러면서도 피부에 닿으면 은은하고 부드러운 머스크 향으로 남았고요. 생각해보면 옷을 입는 취향도 비슷한 것 같아요. 여성스러운 느낌보다는 어느 한쪽으로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는 향이라 오랫동안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향수가 아닌, 가장 좋아하는 자연이나 일상의 냄새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새 잡지의 냄새를 좋아해요. 열렬한 ‘매거진 키드’였던 10 대와 20 대에는 매달 새로 나오는 잡지를 보는 게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였어요. 새 잡지를 처음 펼쳐 페이지를 넘길 때 나는 종이와 잉크 냄새, 매끄러운 종이의 질감에 늘 설렜고요.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더프레이즈에서 다루는 책 중 한 권을 향으로 연결한다면 어떤 향일까요? 혹은 어떤향으로부터 떠오르는 사진집이나 사진작가 등이 있다면요?
파리를 기반으로 발행하는 매거진 ‘스터디(Study)’. 더프레이즈가 한국 디스트리뷰션을 맡고 있는 책이기도 한데, 매 호마다 인물, 공간, 작품 등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글과 사진을 풀어내는 고유한 시선이 인상적인 출판물이에요. 이 잡지를 향으로 표현한다면 퍼퓨머 H(Perfumer H)의 잉크(Ink)가 떠오릅니다. 파리에서 만난 ‘스터디’의 편집장이 입고 있던 더 로우의 감색 재킷과 그의 지적이고 세련된 인상까지, 어딘가 이 향과 닮아 있는 것 같아요.
만약 더프레이즈 그 자체를 향으로 만든다면, 어떤 향으로 만들고 싶은가요?
깨끗한 살냄새처럼 은은하면서도 차갑고 중성적인 향. 화이트와 스틸, 유리, 그리고 책으로 둘러싸인 더프레이즈 1 층 공간과도 꽤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아요. 존재감이 너무 강하기보다는 그 안에 놓이는 책과 오브제, 머무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느껴지는 향이면 좋겠습니다.
김누리
<마리끌레르> 패션 에디터를 거쳐 독립한 뒤, 패션 & 뷰티 브랜드의 비주얼 디렉팅과 스타일링 작업을 하고 있다. 누하동에 서점이자 전시 공간인 ‘더프레이즈’와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 ‘더프레이즈 스튜디오’를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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