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M HOO YOUNG
Amplified
엄후영 UM HOO YOUNG (그래픽디자이너) -
밤의 호텔 라운지, 위스키 냄새, 약간 어수선하고 소란스러운 주변의 소리, 유리잔들이 부딪히는 소리 같은 것들... 이런 풍경을 향으로 만든다면...
오랫동안 색과 형태, 활자로 무언가를 만들어오셨습니다. 지금의 디자인 언어, 혹은 스타일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감각은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제가 선호하는 작업은 대체로 밀도가 있고 맥시멀하고 컬러풀한 쪽이에요. 그렇다고 무질서하게 느껴질 정도로 복잡한 이미지를 만들고 싶지는 않아요. 밀도를 마구마구 올리는 건 너무 쉬운 방법 같거든요. 오히려 엉킨 줄을 풀어내는 것처럼, 복잡하지만 그 안에 묘하게 질서가 느껴지는 작업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대비나 비례 같은 아주 기본적인 조형원리를 많이 사용하는 편이고요. 이런 방식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대학생 때 했던 작업 하나가 기억에 남아요. 미대극회에서 활동할 때 **〈일천구백〉**이라는 연극의 포스터를 맡았어요. 1900년대 대한제국을 배경으로 한 연극이라 시대성이 느껴지는 포스터를 만들고 싶어서 당시 인쇄물들을 많이 찾아봤는데, 딱 ‘포스터’라고 할 만한 자료는 찾기 어려웠어요. 그러다가 우표를 봤는데, 그게 제가 상상했던 그 시대의 이미지가 딱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런데 우표는 아주 작은 판형이고 제가 만들어야 하는 건 A2 포스터였어요. 우표의 레이아웃을 그대로 가져와서 크기만 키우면 벙벙해 보일 게 뻔했어요. 그래서 레이아웃은 차용하되 그 안을 채우는 요소들의 밀도를 신경 썼어요. 동양화과 친구에게 펜화로 삽화를 부탁하고, 타이틀은 붓으로 힘차게 쓴 것 같은 레터링을 만들었어요. 사실 고증을 따지면 엉터리였어요. 제목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로쓰기를 했고 본문은 세로쓰기를 했고, 삽화는 판화적인 느낌을 내려고 했는데 타이틀은 붓글씨 느낌을 냈으니까요. 당시에도 ‘이거 이렇게 안 지켜도 되나?’ 하는 생각은 했어요. 그런데 모든 요소를 정확하게 고증하는 것보다, 여러 가지 요소가 합쳐졌을 때 그 시대를 떠올리게 하면서도 시각적으로 즐거운 인상을 주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디자인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방식이 그때부터 조금씩 있었던 것 같고요.

후각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즐거움보다는 고통을 더 많이 주는 감각인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미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이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향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가끔 악취에 예민한 편인 것 같아요. 좋은 향을 맡는 것보다 나쁜 냄새가 없는 게 더 중요해요. 여기서 말하는 나쁜 냄새는 정말 악취일 수도 있고, 너무 강한 향처럼 제가 원하지 않는 냄새도 포함하고요. 살림에 지금보다 훨씬 익숙치 않았을 때, 빨래에서 어느 순간부터 이상한 냄새가 조금씩 느껴진 적이 있었어요. 처음에는 섬유유연제를 더 넣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섬유유연제도 적정량 이상을 쓰면 안 되는 거더라고요. 이미 잘못 말려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빨래는 세균 때문에 그런 경우가 있어서 향으로 덮는 것보다 멸균을 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도 그 때 알게 됐고요. 그 이후로는 섬유 항균제를 써요. 거의 향이 느껴지지 않는데, 미세하게 살균된듯한 냄새가 나요. 섬유에 향을 입히려는 의도가 없어서 좋아요. 공간에 대해서도 비슷해요. 자취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괜히 향초도 피우고 디퓨저도 써봤는데, 지금은 환기가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향은 가끔 기호품으로 즐기는 게 좋고, 일상 전반에서는 향기든 악취든 인지되지 않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해요.
처음 맡은 냄새, 생애 첫 향에 대한 기억이 있으세요? 어떤 장소거나 어떤 사람이거나요.
옷장에서 나는 나프탈렌 냄새가 기억나요. 박하사탕과 비슷하게 생긴게 옷장에 들어있길래 박하사탕맛과 비슷한 냄새가 나겠거니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처음 뿌린 향수는 어떤 거였어요?
대학 입학을 앞두고 이모에게 선물받았던 겐조의 향수였어요. 아마 겐조(Kenzo) 아무르(Amour)였던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무슨 향이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아요. 당시에는 향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향수는 대단히 신경 쓴 날에만 뿌리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대신 향수병의 유기적으로 휘어진 형태는 기억에 남아 있어요. 그리고 ‘Eau de Toilette(오드뚜왈렛)’이라는 단어를 처음 보고 ‘왜 Toilette이지?’ 하고 의아해했던 것도 기억나고요. 겐조라는 이름과 병의 형태, 그 낯선 단어는 기억나는데 정작 향에 대한 기억은 없는 게 재미있어요. 돌이켜보면 제 첫 향수에 대한 기억은 후각보다 시각과 언어에 더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요즘은 어떤 향수를 쓰세요?
요즘 가장 좋아하는 향수는 리튼온워터(Written on Water)의 옹딘(ONDINE)이에요. 계속 쓰고 싶은 향수이기도 하고요. 저는 향수에 대해서 잘 몰라서 향수 광고나 설명에서 이야기하는 이미지에 엄청나게 영향을 받아요. 옹딘도 ‘바다수영을 하고 나온 뒤의 소금기 섞인 향’이라는 이미지가 너무너무 좋았어요. 당시 일이 바빠서 여름휴가를 못 갔었는데, 이 향수 냄새를 처음 맡았을 때 정말 바다 내음이 느껴졌거든요.
어쩌면 실제로 바다수영을 하는 것보다 이 향수를 뿌리는 게 더 좋을지도 몰라요. 실제로 바다수영을 하고 나오면 젖은 속옷, 아무리 털어내도 다리에 붙어 있는 모래, 젖어서 엉킨 머리카락 같은 거슬리는 감각들이 같이 따라오잖아요. 그런데 향수는 그런 건 쏙 빼고 딱 낭만적인 이미지만 느끼게 해주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그런 불편한 감각까지 있어야 진짜 바다수영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요.
아무튼 이 향수는 여름에 정말 더울 때 샤워를 하고 나와서 바로 뿌리면 좋아요. 축축한 느낌은 가져가면서도 불쾌하진 않거든요. 그리고 샤넬(CHANEL)의 파리-도빌(Paris–Deauville)도 자주 써요. 남편의 이모께 선물받은 향수예요. 이 향수에 대해서는 지금도 딱히 떠오르는 이미지나 인상이 없어요. 주로 여름에 뿌리는데, 쌀쌀할 때도 종종 뿌리고 그냥 일상적으로도 자주 써요.
그런데 왠지 프로페셔널해 보이고 싶은 날, 미팅이 있거나 어른들을 만나는 날에 손이 가요. 왜 그런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제가 가진 유일한 단서는 ‘파리-도빌(Paris–Deauville)’이라는 이름인데, '도빌'이 뭔지도 몰랐으니 아마 ‘파리'라는 단어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 같기도 해요.


지금까지 썼던 향수 중 좋아하는 것들을 말씀해주세요.
앞서 말한 것들을 제외하면 마크제이콥스(Marc Jacobs)의 페어 스플래쉬(Pear Splash)가 기억에 남아요. 제가 직접 썼던 향수는 아니고 여동생이 쓰던 걸 한 번 맡아본 적이 있는데, 그 때 흥미로운 향이었던 것 같은 기억이 있어요. 배 향과 함께 스파이시한 향도 있었던 것 같은데 정확하진 않아요. 그 이후로도 기회가 되면 스파이시한 배 향을 찾아다니고 있는데 생각보다 찾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향수는 아니지만 코티지(Cottage)라는 브랜드의 오션블러썸(Ocean Blossom)향 샤워젤도 기억에 남아요. 대학생 때 한 달 동안 유럽여행을 했는데 그때 사용했던 제품이에요. 여행 중에 다 쓰지 못해서 한국에 돌아와서도 남은 걸 계속 썼는데, 그 향이 유럽여행을 대변하는 향처럼 기억되어서 쓰는 내내 좋았어요. 나중에 다시 찾으려고 했는데 찾을 수가 없더라고요.
생각해보면 옹딘이나 파리-도빌을 좋아하기 훨씬 전부터 바다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거나, 산뜻하면서 한편으로 산미가 느껴지는, 소금기가 있는 향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향수가 아닌, 가장 좋아하는 자연이나 일상의 냄새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세탁소 냄새, 들기름 냄새를 좋아해요. 그리고 섬유유연제를 쓰지 않고 빤 빨래가 바짝 말랐을 때 나는 냄새도 좋아하고요. 음식이나 술도 냄새를 빼고 맛을 이야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란 바르케로(Gran Barquero)의 아몬티야도(Amontillado)라는 스페인 와인의 향도 정말 좋아해요. 드라이하면서 고소한 느낌이 좋고, 아주 살짝 달콤한 느낌도 있어요. 위스키 같은 냄새도 나고요.
혹시 특정한 향 또는 향수제품으로부터 연상되는 영화나 음악, 문학 등이나 어떤 이름이 있을까요? 혹은 그 반대이거나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원제: Medianeras)이라는 영화를 굉장히 좋아해서 종종 다시 봐요. 이 영화를 떠올리면 복잡한 도시의 소음과 좋지만은 않은 공기의 냄새가 같이 연상돼요. 매연이라고 하기엔 매연은 너무 강력한 것 같고, 적당히 복잡하고 매캐한 도시의 냄새랄까요. 그리고 담배 냄새도요.
만약 지금까지의 작업 중 하나를 선택해 향으로 만든다면, 어떤 것을 어떤 향으로 만들고 싶은가요.
2019년에 그렸던 일러스트가 하나 있어요. 친구들과 호캉스를 갔을 때 호텔 바에서 보았던 모습을 그린 그림이에요. 위스키 병들과 각종 잔들이 뒤섞여서 놓여 있는 모습이었어요. 밤의 호텔 라운지, 위스키 냄새, 약간 어수선하고 소란스러운 주변의 소리, 유리잔들이 부딪히는 소리 같은 것들이 기억에 남아 있어요. 이런 풍경을 향으로 만든다면 어떤 향이 될지 궁금해요.

엄후영
현재 독립 디자인 스튜디오<스튜디오 후영후>를 운영하고 있다. 이후 다양한 K-POP 아티스트를 위한 개성 넘치는 그래픽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뉴진스의 데뷔 EP와 이를 위한 다양한 그래픽 디자인 그리고 레드벨벳의 조이, 프로미스9, 트와이스, 하츠2하츠 등을 위한 디자인을 진행했다.
@hooyounghoo & https://hooyounghoo.com/










